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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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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멸망한다면

등록 2021-12-31 19:08 수정 2022-01-01 02:36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지금부터 6개월 14일 뒤, 거대한 혜성이 날아와 지구와 충돌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넷플릭스 영화 <돈 룩 업>의 천문학과 대학원생 케이트 디비아스키(제니퍼 로런스)와 담당교수 랜들 민디 박사(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이 불길한 소식을 들고 백악관에 찾아간다. 무릇 영화 속 미국 대통령이란 외계인의 침공에 직접 전투기를 몰고 나가 맞서거나 전문가들을 소집해 지구를 지켜달라고 고개 숙이는 참된 리더였지만, 도널드 트럼프 시대를 겪은 미국인들은 그런 꿈을 버린 모양이다. 메릴 스트리프가 연기한 올린 대통령은 전 지구적 위기를 선거에 이용할 카드로만 여기는 것으로도 모자라, 과학자들이 기껏 내놓은 해결책을 뒤집고 혜성의 희귀 광물을 탐내는 정보기술(IT) 재벌 이셔웰(마크 라일런스)과 결탁해 사태를 최악으로 이끈다.

거꾸로 가는 세상이 주는 참담함

인류가 외계의 침공이 아니라 인간들의 통제되지 않는 욕망으로 무너지리라는 암울한 예언은 신랄한 풍자와 함께 펼쳐진다. 혜성 충돌의 심각성을 알리려 TV쇼에 출연한 케이트와 랜들에게 제작진은 “가볍고 유쾌하게” 얘기해달라고 요구한다. 중요한 것은 시청률과 조회수, 주가뿐인 세상이라서다. 방송에서 “우리 모두 100% 뒈질 거”라며 분노를 폭발시킨 케이트가 정신 나간 여자로 낙인찍히고 인터넷 ‘밈’이 되어 조롱당하는 동안, 백인 남성인 랜들은 섹시함과는 500광년 정도의 거리가 있음에도 ‘미국에서 가장 섹시한 과학자’라 불리며 미디어의 스타가 된다. 그 와중에도 시시각각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혜성을 직접 보고 판단하라는 이들의 외침은 “위를 보지 말라”(Don’t look up)는 올린의 선동에 묻히고 만다.

예견된 파국이 가까워질 때, 희망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제20대 대선이 2개월 14일 뒤로 다가온 지금, 두 유력 대선주자와 관련해 쏟아져 나오는 기사에 울분을 터뜨리다보면 일상은 종종 엉망이 된다. 후보들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냉담함을 숨기지 않고, 양쪽 진영에서 스피커를 자처하는 이들이 가장 선명하게 공유하는 태도는 여성혐오다. 세상이 거꾸로 가고 있는 것 같다는 스트레스는 정치 때문만은 아니다. 2021년 11월, 서울교통공사는 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를 진행한 장애인 인권단체에 3천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같은 해 12월, 헌법재판소는 미성년자 성폭력 피해자의 피해 진술 영상녹화물을 증거로 쓸 수 있게 하는 법규가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참담함은 무기력으로 이어지기 쉽다. 하지만 아직은 끝이 아니다.

“우리는 끝까지 노력했다”고 말하기 위해

지구 멸망을 막으려 애쓴 모든 것이 수포가 된 뒤, 함께했던 사람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던 케이트는 말한다. “우리가 끝까지 노력했다는 것에 감사해요.” 그래서 나는 지구가 반년 뒤 멸망한다면 그 전에 꼭 이루어지길 바라는 일들에 관해 생각하기로 했다. 하루빨리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좋겠다. 동성혼이 법제화돼 결혼을 원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반려자로서 법적 지위를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 생활동반자법이 제정돼 각자 바라는 가족의 형태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더는 일하다 죽지 않으면 좋겠다. 여성들이 ‘교제살인’으로 목숨을 잃지 않으면 좋겠다. 성폭력 가해자가 엄중히 처벌받고, 피해생존자의 회복에 온 사회가 동참하면 좋겠다. 장애인이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는 데 어려움이 없으면 좋겠다. 세상이 끝나기 전에 이 당연한 바람이 이뤄지면 좋겠다. 언제 이 세상이 끝날지 모르니 새해에는 나도 더 노력하겠다.

최지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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