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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국인 부부는 잘 지내고 있을까…덩리쥔 들으며

“남는 것은 이 순간뿐”이라고 말하는 목소리 《덩리쥔 15주년》
등록 2023-06-16 06:08 수정 2023-06-23 01:19
덩리쥔 데뷔 15주년 기념 앨범은 여러 버전으로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에서 발매됐다.

덩리쥔 데뷔 15주년 기념 앨범은 여러 버전으로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에서 발매됐다.

어릴 때 잠깐 중국어학원에 다녔다. 초등학교 가는 길에 있는 문방구를 지나 골목에 들어서면 같은 반 친구네 칡냉면집이 보였다. 그 집 2층이 중국인 부부가 하는 학원이었다. 1년 정도 다니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그만뒀다. 그때 배운 중국어는 거의 다 까먹었지만 네모난 사탕과 교실에서 부르던 노래만은 생생하다.

왠지 어둑한 느낌이 기억에 남는다. 불 켜진 교실을 빼놓고 나머지 공간은 컴컴했다. 또래 원생이 한 명도 없어서 선생님과 단둘이 마주 앉아 소리 내어 단어들을 읽었다. 쪽지 시험을 잘 보면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유백색의 사탕을 줬다.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얼음사탕이라고 했다. 얼음처럼 심심한 맛이었다. 씹을 때 부서지는 식감이 참 좋았다.

성조와 어순 같은 기초를 다지며 일상에서 자주 쓰는 회화 표현을 배웠다.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때 배운 노래가 덩리쥔(등려군) <첨밀밀>(甛蜜蜜)이다.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라고 했다. 사탕을 받아먹으려고 흥얼흥얼하며 노래를 외웠다. 선생님이 교실 벽에 있는 중국 지도에서 자기 고향을 가리켰다. 손가락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비행기를 타고 이곳에 왔다고 했다.

학원을 그만두고 중학생이 돼 중국 베이징과 톈진으로 수련회를 갔다. 천안문과 자금성을 둘러보고 만리장성을 걸었다. 기념품 가게에서 덩리쥔의 노래가 흘렀다. 중국인 부부가 생각났다. 한국에 돌아가면 기념품 가게에서 산 용 달린 열쇠고리를 들고 선생님을 뵈러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학원 자리에는 다른 가게가 들어와 있었다. 당시 내가 살던 소도시에는 중국어를 배우려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학원도 몇 개 없었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스포츠머리를 한 남자 선생님이 환하게 웃으며 노래 부르던 모습이 선하다. 그때를 떠올리면 엷은 단맛이 난다.

천커신(진가신) 감독의 영화 <첨밀밀>은 톈진 출신의 소군과 광저우 출신의 이교가 홍콩에서 만나 ‘꿀처럼 달콤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덩리쥔의 노래는 영화 속에서 10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두 사람을 잇는다.

덩리쥔 데뷔 15주년 기념 앨범은 여러 버전으로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에서 발매됐다. 덩리쥔은 1953년 대만에서 태어나 1995년 타이 치앙마이에서 숨을 거둔다. 그는 주로 아시아를 순회하며 활동했다. 그의 부모는 대만으로 이주한 외성인이었다. 중국국민당 군인이던 아버지가 국공내전 이후 대만에 넘어와 터를 잡았다.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다 간 덩리쥔의 노래는 쓸쓸하지만 따듯하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가 살지 않은 지난날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는 나카지마 미유키의 <혼자서도 잘 지내>(ひとり上手)를 번안한 <만보인생로>(漫步人生路)에서 “슬퍼도 좋아, 기뻐도 좋아, 매일 새로운 발견을 찾자”(悲也好, 喜也好, 每天找到新發現)고 노래한다. 하루하루 일상에서 인생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리듬을 자연의 속도로 늦출 수 있다면 삼라만상이 새로워질 것이다.

중국인 부부는 잘 지내고 있을까.

듣는 이를 다신 닿을 수 없는 때로 이끄는 덩리쥔의 목소리는 세상 모든 것은 지나가고 남는 것은 이 순간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예쁜 꽃은 자주 피는 게 아니에요, 아름다운 경치도 항상 있는 게 아니죠”(好花不常開, 好景不常在, <하일군재래>(何日君再來))

최지인 시인

*너의 노래, 나의 자랑: 시를 통해 노래에 대한 사랑을 피력해온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최지인 시인의 노래 이야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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