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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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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앞에 와 있는 오래된 슬픔을 곱씹는다

‘사랑 없는 세상’에서 사랑을 기다리는 노래, 김사월 《디폴트》
등록 2024-04-19 11:34 수정 2024-04-26 01:44
김사월 《디폴트》 앨범 재킷.

김사월 《디폴트》 앨범 재킷.


네가 약을 삼키고 오른쪽으로 돌아누웠다. 우리 부부는 기복이 있는 편이다. 한쪽이 가라앉으면 다른 한쪽이 버팀목이 돼 끄집어낸다. 생애에 리듬이 있다면 서로 엇박자인 셈이다. 나는 낙관적이면서 비관적이다. 글 쓰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면서도 글쓰기를 할 때마다 매번 난항을 겪는다.

언젠가 내가 우울한 감정은 쉽게 옮아간다고 했다며 자기가 아프면 나도 아프냐고 네가 물었다. 나는 위로에 서툴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옆에 있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군다. 슬픔은 외면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 어디엔가 쌓이고 쌓이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터져 나온다.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서 열린 을지오비(OB)베어 강제 퇴거를 막기 위한 현장 문화제에 참여한 적이 있다. 골목 가득 플라스틱 테이블이 펼쳐져 있고 많은 사람이 왁자지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 사이 섬처럼 놓인 집회 현장에서 시를 읽었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옆을 지나며 험한 말을 쏟아내는 취객과 무관심한 사람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동안 쌓인 무수한 장소의 수없이 많은 사람의 슬픔과 외로움이 한꺼번에 밀려왔기 때문이다. 가까이서 멀리서 지켜보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내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홀로 침전하고 또 침전하곤 했다.

그동안 글을 쓰면서 내 치부를 고백하는 데 골몰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되풀이하고 싶지 않으니까. 글 뒤에 숨고 싶지 않으니까.

여덟아홉 살 때였나. 방문을 걸어 잠그고 “엄마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라고 적은 쪽지를 문틈으로 밀어 넣었다. 그 뒤의 일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장면의 인상은 각인된 듯 또렷하다.

너는 근래 잠이 늘었고 나는 의욕을 잃었다. 거실에 놓인 화병에는 종잇장처럼 잎이 마른 프리지어가 오래 꽂혀 있다.

김사월은 네 번째 정규 앨범 《디폴트》의 작가 노트에서 “사랑 속에서도 상처가 있음을 인정하고, 어둠 속에서도 빛을 기다릴 수 있는 깨끗한 마음이 우리의 디폴트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앨범에 담았다고 밝혔다. 우리 부부는 이 어둠이 지나면 빛이 밝아올 거라고 믿고 있다. 네가 두 손으로 자동차 핸들을 잡고 공터를 천천히 도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다.

“앞으로 그렇게 살지 말자고 하지만 살기 위해서 그렇게 살았을 뿐인데”(〈못 우는데〉)

이 가사가 오랫동안 귓가에 맴돌았다. 아무런 다짐 없이 일 년을 보내고 올해는 기어코 뜻을 세우자며 뒤늦게 적석사에 갔다. 낙조대에 올라 산자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너는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게 느껴진다고, 할 수 있다고 되뇌는 일상과 힘내자고 말하는 일상이 이제는 싫증 난다고 했다.

자주 아픈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과 감정을 잘 이해하고 감각한다. “나도 그렇고 세상도 쓸모없지만”(〈외로워 말아요 눈물을 닦아요〉) 우리 앞에 와 있는 오래된 슬픔을 곱씹는다. 미사일이 밤하늘을 가로지른다.

김사월은 ‘사랑 없는 세상’에서 사랑을 기다리며 영원을 노래한다. 그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하고많은 부조리한 일에 분노하다 지쳐 체념하기도 하지만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에게 그 마음을 온전히 전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는 말은 턱없이 부족하고, “널 슬프게 하는 널 힘들게 하는 세상을 베어버릴게.”(〈칼〉) 하고 말하면.

최지인 시인

 

유튜브 링크: 〈디폴트〉 오피셜 뮤직비디오(https://youtu.be/pTWhvPn-UoI?feature=shared)

*너의 노래, 나의 자랑: 시를 통해 노래에 대한 사랑을 피력해온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최지인 시인의 노래 이야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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