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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광의 그늘에 주목한 진보당의 반전

농어촌 파괴형 신재생에너지 문제 파고들어 지방선거에서 약진… 대안정당의 모델 될까
등록 2022-09-17 15:56 수정 2022-09-18 01:50
제주도가 풍력발전에 이어 태양광발전도 공공자원으로 관리하기 위한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한겨레 허호준 기자

제주도가 풍력발전에 이어 태양광발전도 공공자원으로 관리하기 위한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한겨레 허호준 기자

2022년 6월1일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진보당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울산 동구청장을 포함해 광역의원 3명, 기초의원 17명이 당선됐는데, 4년 전 민중당(진보당의 전신) 이름으로 치렀던 제7회 지방선거 결과(기초의원 11명)와 비교해 양적·질적으로 차이가 크다.

진보당 약진에 대해 흔한 평가는 민족해방(NL) 계열 사회운동 활동가들의 현장 중시 기풍이 빛을 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으로 성과를 낸 것은 아니다. 주민들의 사회경제적 이해관계가 걸린 현안에 목소리를 높이고, 적극적으로 이슈를 발굴한 결과다. 또 이념적으로 유연한 입장을 취했다. 지역 내 시민·농민·노동 운동에 오랫동안 헌신한 이들을 일찌감치 지방선거 출마자로 정해 표밭을 다지게 한 전략도 폈다.

태양광 사업은 현대판 인클로저

이를 잘 보여주는 지역은 전라남도다. 진보당 소속 광역의원 2명과 기초의원 5명이 전남에서 당선됐다. 진보당 관계자들은 크게 두 현안에 목소리를 높였다고 이야기한다. 먼저 지방자치단체가 농어민에게 지급하는 일종의 기본소득인 농민수당이다. 농민수당은 2016년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에서 처음 의제를 제기했고, 2019년 해남군을 시작으로 광역지자체 11곳과 기초지자체 120여 곳에서 도입했다.

진보당은 전농과 함께 농민수당 도입 주민조례청구 운동을 전개했다. 2016년 총선부터 꾸준히 농민 대상 간판 정책으로 내세웠다. 장흥군 1선거구에서 62%를 득표해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압도한 박형대 도의원은 전농 정책위원장 출신으로, 주민조례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진보당 의원들의 당선 배경으로 농민수당이 꼽힌다.

둘째는 이른바 ‘농어촌 파괴형’ 신재생에너지 문제다. 진보당은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발전소가 무분별하게 농촌으로 파고드는 데 이의를 제기해왔다. 2022년 2월 대선을 앞두고 ‘농어촌 파괴형 풍력·태양광 반대 전남연대회의’는 “모두가 저희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 때 오직 진보당에서만 저희와 뜻을 함께했다”며 김재연 진보당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한국에너지공단에 따르면 2020년 말 기준 태양광·풍력 발전 용량이 가장 많은 곳은 전남으로 3967메가와트(㎿)였다. 그다음이 전북(2987㎿), 경북(2455㎿), 충남(2203㎿) 순이었다. 시·군·구별로 따지면 해남(533㎿), 영광(435㎿), 김제(431㎿), 영암(428㎿), 익산(410㎿) 순이었다. 전남과 전북 지역에 몰려 있는 셈이다. 전국 1위 해남군은 서울시(187㎿)의 2.8배 규모다. 대개 태양광인데 다수가 농지를 전용했다. 땅값이 싸기 때문이다. 소금기가 밴 간척지 다수를 농사짓기 어려운 염해농지로 간주해 태양광발전소를 짓기 쉽게 한 규정도 한몫했다.(표1 참조)

그 결과 나타난 현상은 태양광판 ‘인클로저’(16~18세기 영국에서 양 방목지 등을 만들기 위해 농민을 내몰았던 행위)다. 유영갑 순천시의원은 “농민들이 빌려 농사짓는 땅이 전체의 60% 정도”라며 “지주들에게 토지 임대료를 높여 부르거나 아예 땅을 사버리는 방식으로 태양광발전소를 지으면 농민들이 밀려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트랙터, 콤바인 등 고가 농기계 의존도가 높아진 상황이라 경작면적이 줄면 채산성이 나빠져 농사를 포기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육상 풍력 소음 문제 투쟁해 군의회 진출

육상 풍력도 문제다. 2022년 6월 환경부는 풍력발전기 35기 인근에 사는 전남 영광군 주민 163명이 저주파 소음으로 피해를 입었다며 발전사에 배상을 명령했다. 이곳의 풍력발전기 일부는 마을에서 불과 300m 거리에 있다. 화순군의 경우 민주당 일색인 군의회가 2020년 풍력발전 시설과 마을의 거리 기준을 10가구 이상이면 1200m, 그 미만이면 500m로 완화하면서 파문을 일으켰다. 풍력발전소 개발이 예정됐던 동복면 주민들은 차량으로 40분 거리인 읍내에 매일 나와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2년간 진행된 반대투쟁을 적극적으로 도운 김지숙 화순군의원이 6·1 지방선거에서 당선됐다. 김 의원은 “이격거리 규정을 원상복구하는 내용의 조례 주민발의를 군의회가 묵살하는 등의 행태를 유권자가 심각하게 여겼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김 의원은 결혼하면서 화순에 정착했다. 17년 정도 살면서 교육협동조합 등의 활동을 해왔다. 유영갑 의원은 20대 때부터 농민운동에 헌신했다. 이 밖에 순천에서 아파트 비율이 높은 곳 중 하나인 왕조1동을 지역구로 삼는 최미희 의원은 오랫동안 지역에서 활동했다. 진보당은 2021년부터 지방선거 출마자를 정하고 1년 이상 표밭 다지기를 했다.

진보정당의 위기에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민주당이 왼쪽으로 활동 반경을 크게 넓힌 것도 한몫했다. <중앙일보>와 한국정치학회가 16대(2000년)~20대(2016년) 총선에서 민주당계 의원들의 정책이념지수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000년 3.7점(지수는 1점에서 7점 사이인데 숫자가 낮을수록 진보)에서 19대 2.7, 20대 2.4로 진보 성향이 강해졌다. 20대에서 정의당의 이념지수는 1.7이었다.(표2 참조) 민주당과 차이가 줄었다. 민주당이 복지 확대, 최저임금 인상, 기본소득 등을 내세워 지지층을 넓혀온 행보 때문이었다. 여기에 더해 민주당의 주류가 된 1980년대 유명 대학 운동권 출신과 진보정당 안팎의 인사들은 여러 네트워크로 엮여 있었다.

가치 추구보다 생존권이 중요하다

진보당의 행보는 대안정당이 거대 정당의 구심력에 이끌리지 않기 위해서는 ‘현장성’을 확보해야 함을 시사한다. 불평등·환경·여성 등을 내세우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해당 의제를 자신의 것으로 보는 유권자 집단에 기반해야 한다는 얘기다. 가령 도시 중산층의 세계에서는 단순히 신재생에너지가 찬반으로 끝날 사안이지만, 발전소를 짓는 농촌에서는 친환경 정책 기조 속에 유연하게 주민들의 생존권 요구를 대변해야 하는 문제가 된다. 최근 일각에서 제기되는 지역정당도 날카롭게 갈등이 형성된 사안에서 주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세력이 성공할 것이다.

조귀동 <전라디언의 굴레> 저자·<조선비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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