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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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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단계는 피해자의 좋은 동료 되기

‘성희롱’ 규제 20년, 성희롱 예방교육 의무화 등 생겼지만…
등록 2020-07-25 05:55 수정 2020-07-28 01:35
고용노동부 공무원을 대상으로 성희롱 예방 교육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고용노동부 공무원을 대상으로 성희롱 예방 교육이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시장 비서로 일하면서 위력(힘)에 따른 성희롱·성추행으로 고통받았다고 호소하는 피해자에게서 ‘나’를 보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4년이나 참았다가 왜 이제 말하냐’ ‘결정적 한 방을 내놓으라’며 피해자에게 비난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차이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여러 요인 중 하나는 성차별, 성적 괴롭힘을 인지하는 민감성(성인지 감수성)이 성별·세대별로 다르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겨레21>이 설문조사업체 ‘오픈서베이’에 의뢰해 7월22일 전국 20~59살 남녀 500명에게 한 ‘직장 내 성평등 인식 조사' 결과를 보면, “외모에 대한 칭찬도 직장 내 성적 괴롭힘이 될 수 있다”는 질문에 20대 여성 37.1%가 ‘매우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나 50대 남성은 3.2%에 그쳤다. “업무 외 사적인 메시지 전송은 성적 괴롭힘이 될 수 있다”는 항목에서도 20대 여성 38.7%가 ‘매우 그렇다’고 했지만, 50대 남성은 14.5%에 그쳤다. 성인지 감수성의 격차가 큰데도 성희롱·성폭력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는 심판자를 자처해 ‘나는 옳은 판단이 가능하다’고 착각한다. 이런 착각은 2차 가해로 이어질 수 있다. _편집자주

“남녀관계에서 일방의 상대방에 대한 성적 관심을 표현하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허용돼야 하지만, 그것이 상대방의 인격권을 침해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정신적 고통을 주는 정도에 이르는 것은 위법하여 허용될 수 없다. 상대방의 성적 표현 행위로 인해 인격권의 침해를 당한 자가 정신적 고통을 입는다는 것은 경험칙상 명백하다.”

한국에서 성희롱 규제는 1999년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을 개정하면서 생겨났다. 한 해 전인 1998년엔 성희롱의 법적 책임을 묻는 첫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대 교수 성희롱 사건’의 피해자(조교)를 대리해 판결을 이끌어낸 사람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다. 그 뒤 성희롱 관련 법제는 ‘성희롱 예방교육 의무화’를 비롯해, 피해자 보호와 가해자에게 취해야 하는 조처 등을 강화하고 세부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성희롱 사건을 다루는 법원의 판결도 그랬다. 용기 낸 피해자들이 잇따랐고, 이들을 도운 여성·시민운동가들 덕분에 성별과 지위에 따라 인권을 침해받지 않도록 성차별 법제와 판례가 발전했다. 그러나 성추행 고소 뒤 박 전 시장의 극단적 선택, 그리고 피해자와 그의 조력자에게 쏟아지는 ‘2차 가해’는 20여 년간 쌓아온 공든 탑을 위태롭게 한다.

“반복된 성희롱, ‘우발적’이라고 할 수 없다”

성희롱은 미국과 유럽에서 만들어진 ‘성적 괴롭힘’(Sexual Harassment)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공공·민간 부문을 막론하고 1년에 한 번씩 성희롱 예방교육을 받는 게 의무화한 지는 20년이 다 돼가지만, 성희롱 개념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경우는 드물다. 성희롱의 법적인 정의(남녀고용평등법, 양성평등기본법, 국가인권위원회법)는 “사용자·사업주·상급자 또는 노동자가 업무·고용 또는 그 밖의 관계에서, 직위·지위 또는 업무와 관련해, 성적 언동 또는 성적 요구를 하는 방법으로 상대방에게 성적 굴욕감·혐오감 또는 불이익을 주는 행위”를 말한다. 육체적·언어적·시각적 행위를 모두 포함한다. 직장 상사가 사무실에서 부하직원의 특정 신체 부위를 만졌다면 성추행(형법상 강제추행)이자 성희롱이 되고, 음란한 사진을 보냈다면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의 통신매체 이용 음란죄이자 성희롱이 된다.

그럼에도 성희롱에 관한 문제제기가 일어나면, 가해자로 지목된 이는 보통 ‘우발적으로 발생한 일이다’ ‘관행과 직장문화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2008년 대법원은 직원 10여 명에게 수시로 성적 농담을 하고 추행했던 삼성카드 지점장 해고 사건에서 “성희롱이 일정 기간 반복적으로 이뤄진 경우, 피해자가 다수인 경우에는 우발적이라 평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왜곡된 사회적 인습이나 직장문화 등에 의해 형성된 평소의 생활태도 때문에 문제되는 행위가 발생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1999년 개정된 남녀고용평등법에서 성희롱 행위를 금지하고 예방교육과 행위자에 대한 징계 등을 규정한 이상 그 이후에 발생한 성희롱은 행위의 정도를 가볍게 판단할 수 없다”고 했다. “왜곡된 사회적 인습을 깨뜨리고 직장문화를 고치기 위해 성희롱 금지 규정이 생겨난 지 20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인습과 문화에서 발생한) ‘과실’ 주장은 받아들여질 여지가 없다.”(김진, ‘성희롱 규제 20년: 법제 발전과 주요 판결례를 중심으로’)

여성을 ‘냄비’로 비난한 것도 “성희롱”

‘피해자를 좋아해서 그런 일이다’ ‘성적인 의도가 없었다’는 항변도 있다. 그러나 법원은 “일반적이고도 평균적인 사람이라면 성적 굴욕감·혐오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행위가 있고, 그로 인해 피해자가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꼈음이 인정돼야 한다”는 기준에 따라 성희롱을 판단해왔다.

2016년 국가인권위원회 사례를 보면, 기혼 남성인 상급자가 미혼 여성 직원에게 수차례 좋아한다고 고백하고는 피해자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퇴사하겠다고 압박했고, 결국 피해자는 정신적 고통으로 회사를 떠났다. 인권위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부하직원이 아닌 사적인 관계의 여성으로 생각한 언동으로 성적 굴욕감과 혐오감을 느끼기에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가해자가 퇴사를 지속해서 언급한 것이 피해자의 퇴사 압박과 같은 고용상의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다”며 성희롱으로 인정했다. 기간제 노동자를 관리하는 부서의 팀장이 여성 기간제 노동자에게 여성이 선정적인 옷을 입고 춤추는 동영상을 보낸 행위(2014년 의정부지법)나, 소방대원이 여성대원과 TV 드라마를 보면서 “냄비들이 문제야”라며 수차례 여성을 ‘냄비’로 비난한 행위(2014년 서울행정법원)도 법원이 인정한 성희롱이다.

성희롱 사건에서는 ‘사건이 발생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왜 문제를 제기하냐’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냐’며 피해자 말을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2018년 대법원은 학생들에 대한 성희롱으로 해임된 대학교수의 교원소청심사위원회 결정 취소 사건에서, 성희롱 행위 이후 학생들이 해당 교수의 수업을 계속 수강하고 긍정적인 강의 평가를 했다는 이유로 피해자들의 진술 신빙성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이른바 ‘성인지 감수성’ 판결).

“우리 사회의 행위자(가해자) 중심적인 문화와 인식, 구조 등으로 인해 피해자가 성희롱 사실을 알리고 문제를 삼는 과정에서 오히려 부정적 반응이나 여론, 불이익한 처우 또는 정신적 피해 등에 노출되는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2차 피해에 대한 불안감이나 두려움으로 인해 행위자와 종전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거나, 즉시 신고하지 못하다가 제3자가 문제를 제기하면 비로소 신고하는 경우도 있고, 수사기관·법원에서 그에 관한 진술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성희롱 피해자가 처해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해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른 증거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 피해자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게 대법원 판례의 핵심이다.

남성도 성희롱 피해자 될 수 있어

최근에는 피해자가 남성이거나 남성 사이의 성희롱을 인정한 사례도 드물지 않다. “성희롱 성립 여부를 판단할 때 가해자와 피해자의 생물학적인 차별보다는 성희롱 행위가 놓여 있는 맥락이 ‘권력관계’라고 지칭될 만한 성격을 띠고 있는지”(김선화, ‘하급심 판례에서의 성희롱 개념 판단에 관한 검토’)를 기준으로 삼는 까닭이다. 결국 성차별 법제의 목적은 일터에서 모든 사람이 상급자나 동료에게 성적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더 나은 근무환경을 만드는 데 있다. “성희롱 피해자가 말할 수 있는 사회, 성희롱 사건이 있을 때 제대로 대처하는 사용자를 넘어, 이제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성희롱 피해자의 좋은 동료 되기’를 배워야 한다.”(김진, ‘성희롱 규제 20년: 법제 발전과 주요 판결례를 중심으로’)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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