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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장애인 앞에 평등한가 [2022 장애인 인권 판결]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2022년 장애인 인권 디딤돌·걸림돌 판결 선정
등록 2022-05-02 12:59 수정 2022-05-04 02:00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BF·Barrier Free) 인증 확대를 알리는 캠페인이 2022년 4월19일 오후 서울역 앞 계단에서 열려 비에프(BF) 스티커가 계단에 붙어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BF·Barrier Free) 인증 확대를 알리는 캠페인이 2022년 4월19일 오후 서울역 앞 계단에서 열려 비에프(BF) 스티커가 계단에 붙어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법원은 소수자가 마지막으로 기댈 언덕이다. 필요한 서비스를 받지 못해, 직장에서 부당해고를 당해, 비장애인과 다르게 차별 대우를 받아, 장애인들은 끝내 법원을 찾는다. 시민단체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2015년부터 해마다 장애인 인권에 디딤돌·걸림돌이 된 판결을 선정해 발표하고 있다. 재판을 통한 장애인의 권리 구제 현황을 파악하기 위한 ‘사법 모니터링’이다.
2022년에는 2021년 선고된 민사·행정 분야 판결문을 대상으로 4개월여 선정 작업을 진행했다. 변호사 32명이 2021년 1~12월 ‘장애’라는 단어를 언급한 전국 법원의 판결문 240개를 모았다. 그중 판결문 77개를 선별하고(1차 선정) 다시 판결문 16개를 추려냈다(2차 선정). 선정위원들은 세 차례 회의 끝에 디딤돌 판결(5건), 걸림돌 판결(2건), 주목할 만한 판결(7건) 등 모두 14개의 판결을 선정했다. 주목할 만한 판결은 디딤돌 판결보다 그 의미는 덜해도 장애인 인권과 관련해 많은 고민을 하게 한 판결이다. 권건보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동호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정책위원장, 서동후 변호사, 이주언 변호사, 이호선 성공회대 시민사회복지대학원 외래교수, 정제형 변호사, 최정규 변호사, 표경민 변호사 등 장애인 인권 분야 전문가 8명이 머리를 맞댔다. <한겨레21>은 선정된 판결과 그 의미를 정리해 전달한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5월 중에 ‘2022 장애인 인권 디딤돌·걸림돌 판결 선정 보고회’를 열 계획이다.

시각장애인 박미정(42·가명)씨에게 웹사이트는 보는 게 아니다. 듣는 것이다. 그는 소리를 통해 웹사이트 정보를 파악한다. 컴퓨터에 설치된 화면낭독 프로그램 ‘스크린 리더’가 웹사이트에 게시된 문구를 읽어준다. 사진 등 이미지는 읽어줄 수 없으니 말로 풀어 설명해준다.

인터넷 세상에서 마주한 차별

그러나 박씨는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곤 했다. 특히 온라인 쇼핑몰을 이용할 때다. 상품 설명 대다수가 이미지인데 말로 풀어 설명하게 돼 있는 ‘대체 텍스트’가 부정확하거나 아예 의미 없게 입력돼 있어서다. “상품을 잘못 사거나 아예 고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죠. 최근에는 일반세탁기용과 드럼세탁기용 세제를 구분하지 못해서 세제를 잘못 샀어요. 반품하는 것도 불편하니까 주변에 필요한 사람들한테 나눠주는데 시각장애인도 소비자잖아요. 소비자로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니까 화가 날 수밖에요.”

아이를 출산하고 나니 분노는 더 커졌다. 아이에게 달걀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제품 상세정보를 꼼꼼히 살펴서 음식을 사야 했다. 그러나 온라인 쇼핑몰에 올라온 제품 상세정보는 대부분 이미지로 돼 있다. 대체 텍스트는 주원료나 함량, 영양성분, 사용시 주의사항이 아니었다. “품질표시 이미지” “이미지01” 등 아무 의미 없는 단어의 나열만 귀에 들렸다. “아이가 사용할 제품의 주성분, 보관방법, 주의사항, 하물며 옷 한 벌을 사더라도 면인지 리넨인지 반팔인지 칠부인지…. 하나하나 확인하고 사는 게 아예 불가능해요.”

코로나19로 비대면 시대가 열렸다고들 한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에게는 아직 오지 않은 시대다. 오프라인 마트를 방문해 마트 직원의 도움으로 물건을 구매하는 것에는 오래전부터 한계가 있었고 어쩌면 인터넷은 가능성의 공간이었을 테다. 그러나 장애인은 인터넷 세계에서도 또 다른 차별에 직면한다. 장애인의 웹 접근성을 비장애인과 동등한 수준으로 보장하라고 줄기차게 주장하는 이유다. 상품 검색, 구매 결정, 대금 결제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어려움 없이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른 사업자의 의무이기도 하다. 웹사이트는 신체적·기술적 여건과 관계없이 장애인이 원하는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접근성을 보장해야 한다.(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령 제14조) 2008년 4월 시행된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정보통신·의사소통에서 정당한 편의제공 의무를 단계적으로 늘려가도록 했다. 이에 따라 온라인 쇼핑몰 같은 법인은 5년의 유예기간을 지나 2013년 4월부터 정당한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유예기간이 무색하게 됐다. 판매업자가 상품 정보를 올릴 때 이미지 사용을 줄이거나 이미지를 사용하더라도 대체 텍스트를 직접 기재하도록 관리하면 될 일인데 그 조차도 하지 않았다.

2017년 분노한 시각장애인들이 대형 쇼핑몰을 상대로 소송하기로 했다. 선례는 있었다. 2006년 2월 미국의 시각장애인들이 온·오프라인 쇼핑몰 ‘타깃’이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장애인법(ADA) 등을 위반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의 영향으로 ‘타깃’은 이미지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고 기본적인 제품 설명은 문구로 기재하거나 대체 텍스트를 제공하는 식으로 사이트 운영 방침을 바꿨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위자료 10만원씩 지급, 판결 확정 뒤 반년 내 대체 텍스트 제공”

3개월 동안 700명의 소송 참여 원고를 모으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원고 모집 한 달 만에 900명 넘게 모였다. 2017년 9월 1·2급 시각장애인 963명이 이마트(SSG닷컴), 이베이코리아(지마켓), 롯데쇼핑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차별행위로 인한 위자료 각 200만원을 청구하고 시각장애인이 온라인 쇼핑몰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할 것을 청구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제48조)에 따라 법원은 차별적 행위를 중지하고 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를 하라고 명령할 수 있다.

온라인 쇼핑몰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대체 텍스트를 제공하지 않은 것은 다툼의 여지 없는 사실이다. 쇼핑몰들은 책임을 상품 판매업자에게 돌렸다. 온라인 쇼핑몰에 올라오는 상품을 협력업체가 직접 등록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협력업체 관리·감독에도 한계가 있고 하루에 수백 건씩 등록되거나 수정되는 상품에 대해 쇼핑몰이 직접 대체 텍스트를 기재하는 데 과도한 비용이 든다고 주장했다.

법정에서 온라인 쇼핑몰 쪽 주장을 듣던 박씨는 여러 차례 치미는 화를 참았다. 민사소송 당사자는 반드시 재판에 출석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박씨는 재판이 열릴 때마다 방청하려고 노력했다. 1심 선고를 얼마 앞두지 않았을 때다. 판사가 원고 중에 출석한 사람이 있는지 물었고 방청석에 앉아 있던 박씨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박씨에게 발언할 기회가 주어졌다. “우리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엄연한 권리인데 쇼핑몰 회사는 책임이 없다고 서로 발뺌만 하는 것 같더라고요. 재판을 여러 번 방청했지만 올 때마다 상처를 받은 채 집에 돌아가곤 했습니다. 법원의 현명한 판단을 부탁드립니다.”

2021년 2월18일 1심 판결이 내려졌다. 소송을 낸 지 3년 만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0부(재판장 한성수)는 온라인 쇼핑몰들은 시각장애인들에게 차별행위로 인한 위자료 각 10만원을 지급하라고 밝혔다. 위자료 액수는 소송에 참여한 963명 중 해당 웹사이트를 이용한 적 없는 사람이 포함됐을 가능성을 고려해서 정했다. 아울러 판결이 확정되는 날로부터 6개월 이내에 상품에 관한 필수정보와 광고 등의 대체 텍스트를 제공하라고 명령했다.

판결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인터넷 사용이 보편화됨에 따라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웹사이트에 접근해 정보를 이용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지속적으로 웹 접근성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상당수 상품에 대한 상세정보를 담고 있는 웹페이지에는 대체 텍스트가 입력돼 있지 않다. 이는 피고들이 웹사이트를 운영함에 있어 원고들을 형식상으로는 불리하게 대한 것이 아니더라도 전자정보에 접근할 때 실질적으로는 불리한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법원은 적극적 조치에 대한 쇼핑몰 쪽 주장을 일축했다. “대체 텍스트를 제공하는 것은 법적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지 시각장애인을 배려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매출액, 사업규모 등에 비춰볼 때 과도한 비용이 든다거나 경제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힐 정도에 해당한다고 볼 객관적 자료가 제출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판결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선정하는 ‘2022년 장애인 인권 디딤돌·걸림돌 판결’에서 디딤돌 판결의 하나로 선정됐다.(서울중앙지법 2017가합33112 등)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적극적 구제조치제도가 마련돼 있음에도 법원이 이를 활용하는 데 주저하는 태도를 보여왔다. 그런 점에서 일정 기간 내에 대체 텍스트를 제공하라고 명한 것은 향후 법원이 장애인 차별의 실효적 구제를 위해 적극 조치를 활용하는 자극제가 될 것이다.”(권건보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목소리 모아 변화를!

쇼핑몰들이 1심 판결에 불복하면서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그래도 박씨는 뒤늦은 희망을 발견한 기분이다. “이 판결이 장애인의 권리를 조금이나마 보장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요? 힘들었지만 재판을 방청한 게 헛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역시 한 사람의 목소리로는 안 되는구나. 목소리를 모으니 이런 변화도 찾아오는구나 싶어요.”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특집 - 2022 장애인 인권 판결


법은 장애인 앞에 평등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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