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눈물을 건네며 약사는 말했다. “한 달 안에 사용해야 하는 거 아시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한 달이요?” 되묻고 나서야 ‘그래, 유통기한이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들으면 너무나 당연한 상식인데, 듣기 전까지 생각조차 못하는 일이 있다.
나의 안일함도 놀랍지만, 유통기한을 고지받은 게 이날이 처음이라는 사실도 놀랍다. 그동안 약국에서 산 인공눈물이 수십 개는 될 텐데. 생각해보면 하루 몇 회, 투약법을 말해준 약사도 드물었다. 물론 동봉된 설명서를 읽으면 유통기한은 물론 부작용이나 정확한 투약법까지 알 수 있겠지만, 안약 하나 사면서 다들 그 깨알 같은 글씨를 찾아 읽는다고? 누구 탓을 해야 할지 모를 마음으로 인공눈물 하나 손에 쥐고 약국을 나왔다.
‘왜 말을 안 해줬어요?’ 묻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게 따지려다가도 내 몸 내가 앞장서 챙기지 못한 건 내 잘못 같아 수그러들게 되지만. 그럼에도 ‘왜?’가 머리를 맴도는 그런 일이 있다. 일하다 아픈 몸으로 이 질문을 하면, 그건 직업병이겠다. 직업병의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그런 일이다. 왜 말을 안 해줬나요? 작업환경의 위험을 일하는 사람들에게 고지하고 관리하고 예방하지 않은 책임을 묻는 일.
이번 겨울, 장례지도사 자격증 취득 수업을 들었다. 이론수업과 현장실습을 병행해야 했다. 장례식장에 실습 갈 채비를 하며 내가 떠올린 건 일터의 안전 같은 게 아니었다. 부패한 주검의 생경한 몰골과 냄새. 다른 수강생들도 비슷해 보였다. 취업률과 기본급, 교대근무 형태가 주 관심사였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사와 무관하게 이 일에도 숱한 직업병이 도사렸다.
수의를 입힐 땐 손목과 어깨에 힘이 꽤 들어갔다. 주검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근골격계질환 당첨이다. 곡소리에 우울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물론 다들 이렇게 말했다. 익숙해지면 괜찮아. 안 괜찮아지는 사람이 겪는 게, 업무관련성 정신질환이다. 그리고 고인을 매개로 한 감염.
한 날은 수업 중 강사가 물었다. “간염 예방 접종은 하셨죠?” 마침 건강검진에서 B형 간염 항체가 없다는 결과지를 받은 참이었다. “우리가 접할 수도 있는 고인의 간염 바이러스는 오랜 치료로 항생제에 내성이 생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감염되면 치료는 더 어렵죠.”
다음날, 보건소를 찾았다. 하루 정도 주사 맞은 자리가 뻐근할 거란 말을 듣고 돌아와 두 권짜리 장례지도사 표준교육교재를 들췄다. 꽤 두꺼운 교재를 한장 한장 넘기다보니 ‘위생관리’ 단원 마지막 장에 직업병에 관한 내용이 있다. “장례 종사자는 혈액과 체액 접촉을 통해… 생물학적 인자에 감염될 수 있다”로 시작한 내용은 간염 바이러스 차단법으로, 수술용 장갑 착용과 특정 소독액으로 오염 부위 세척을 제시했다. 그런데 학교 다닐 때, 교과서 맨 마지막 단원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나? 물론 교재에서 숱한 감염병을 배웠다. 홍역, 디프테리아, 유행성이하선염 등 숱한 감염질환의 종류와 경로. 하지만 감기가 어떤 감염 증상인지 안다고 절로 예방되는 건 아니니. 마스크 쓰라는 말 한마디가 더 도움이 된다.
일을 배울 때는 구체적으로 배운다. 이 교재만 해도, 유족을 대하는 장례지도사의 태도로 “전화벨이 두 번 울리기 전에 받는다”고 일러두기까지 한다. “고객의 말에 무조건 ‘예, 알겠습니다’로 시작하라”는 내용도 있다. ‘구체’가 넘치다 못해 지나치다. 왜 종사자의 안전을 다루는 데는 이러한 ‘과함’이 없는가.
막상 들으면 너무나 당연한 상식인데, 듣기 전까지 생각조차 못하는 말이 있다. 그 무엇보다 일하는 사람의 안전과 생명이 중요하다 같은 말. 미처 생각 못하는 사이, 우리는 매일 일터에 가니 굳이 적어둔다.
희정 기록노동자·<베테랑의 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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