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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베트남을 ‘잊었는가’

베트남전 끝난 뒤 한국에서 전개된 두 번째 전쟁
등록 2023-06-09 03:18 수정 2023-06-16 03:49
<두 번째 베트남전쟁> 윤충로 지음, 푸른역사 펴냄, 2023년

<두 번째 베트남전쟁> 윤충로 지음, 푸른역사 펴냄, 2023년

삼각지역을 지나는 지하철 안이었다. 갑자기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렸고, 서울 지역에 경계경보를 발령하니 대피할 준비를 하라는 문자가 떨어졌다. 국내 최대 포털 사이트도 먹통이 된 상황, 정보를 구할 수 없으니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뻗어나갔다. 괜히 일찍 집을 나섰다는 후회, 역 밖으로 나왔을 때 주변이 쑥대밭이 됐으리라는 두려움. 행정안전부의 ‘오발령’ 문자가 도착하기까지 짧은 시간은 전쟁의 무서움을 실감케 하는 데 모자라지 않았다.

2023년 5월31일 아침을 헝클어버린 재난문자를 단순한 해프닝으로 볼 수만은 없다. 분단 속에 살아가는 냉전국가 한국에서 전쟁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공식적인 ‘종료’ 뒤에도, 전쟁은 오래 그곳에 남아 사람들의 일상을 구속하고 기억을 조작한다. 윤충로의 <두 번째 베트남전쟁>은 현대 한국을 파괴하고, 만들어낸 수많은 전쟁 중에서도 ‘하필이면’ 베트남전에 주목한다. 흔히 “잊힌 전쟁”으로 치부되는 베트남전이지만, 지은이가 보기엔 전쟁이 잊혔다는 사실이야말로 중요하다. 잊힘이란 ‘수동적’ 망각이 아닌, 위로부터의 획일적 기억이 아래로부터의 다양한 기억을 ‘능동적으로’ 억누른 결과이기 때문이다.

전작 <베트남전쟁의 한국 사회사>에서 베트남전과 ‘더불어’ 변해갔던 한국 사회를 그려낸 지은이는, 이번에는 베트남전이 ‘끝나고’ 전개된 두 번째 전쟁에 초점을 맞춘다. 한국군이 철군한 지 2년여가 흐른 1975년, 남베트남이 붕괴하자 박정희 정부는 긴급조치를 연이어 발령하며 안보 위기를 조장했다. 학생, 부인회, 교회, 연예인협회, 공·사기업 임직원, 반공연맹, 재향군인회 등이 앞다퉈 반공 궐기대회를 열었고 급기야 이들 단체를 모아 ‘총력안보국민협의회’가 결성됐다. 긴급조치 제9호 선포를 알리는 1975년 5월13일 <경향신문> 1면에 “월남 난민” 1366명을 태우고 부산항에 입항한 해군 상륙함(LST)의 사진이 함께 실렸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남베트남 ‘패망’은 한국 반공주의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쓰였다.

물론 베트남전의 기억이 국가에 의해 전적으로 독점되지만은 않았다. 통일혁명당(통혁당)과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등 독재에 맞서는 혁명세력은 베트남을 바람직한 민족해방운동 모델로 소환했다. 리영희는 인류애와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베트남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이끌어냈다. 1980년대 학생운동권 역시 수많은 금서와 번역서를 읽으며 베트남의 경험을 변혁의 밑천으로 삼고자 했다. 다만 이들의 베트남전 ‘다르게 보기’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참전군인, 제3국으로 떠난 파월 기술자, 한국에 온 월남 난민을 비롯한 ‘당사자’의 목소리를 고려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과 민간인 학살에 대한 고민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국가와 저항세력 모두 외면하던 아래로부터의 전쟁 기억은, 1999년 5월 <한겨레21> 보도로 처음 터져나왔다. 이후 국내에서의 기억 투쟁에 집중하던 한국의 베트남전 과거청산운동은, 2015년 이후 학살 ‘생존자’ 응우옌떤런과 응우옌티탄을 초대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2018년 4월21~22일 서울에서 열린 시민평화법정은 한국 시민사회와 베트남전 피해자의 연대가 새로운 정의를 세울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다만 더욱 폐쇄적인 형태로 굳어가는 참전군인의 기억과 고엽제 피해자의 복합적인 정체성 등 풀지 못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2023년 5월24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 조사를 각하했다. 두 번째 베트남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찬근 대학원생*유찬근의 역사책 달리기: 달리기가 취미인 대학원생의 역사책 리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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