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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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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추울 때 싹 낼 준비하는 토종씨

전남 곡성 편
전국에서 모인 토종씨앗, 시골청년 등과 함께 담아 보내… 널리 퍼지는 건 자유고 자립이다
등록 2024-01-26 10:47 수정 2024-02-01 11:53
나눔할 동부 씨앗을 소봉투에 넣고 있다.

나눔할 동부 씨앗을 소봉투에 넣고 있다.


가장 춥다는 대한이 지났는데 벌써 봄이 온 것 같다. 토종씨드림에 이 시기는 봄에 심을 씨앗을 나누는 중요한 때이기 때문이다. 토종씨드림에 씨앗 나눔은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의식이자 축제다. 2월이면 육묘 농가에선 비닐하우스 모종 포트에 고추 씨앗을 넣는다. 일찍 씨앗을 보내는 이유다. 가장 추울 때 싹 낼 준비를 하는 셈이다.

씨앗 나눔은 결코 토종씨드림 사무국만의 일이 아니다. 전국 회원들과 함께한다. 12월 중순이면 전국 소규모 농가 회원들이 토종씨앗을 정성껏 채종해 보내준다. 양평, 곡성, 울산, 인천, 괴산, 고창, 창원 등. 토종씨드림 공식 채종포 ‘은은가’에서도 1년 내내 비지땀을 흘려 씨앗을 낸다. 이렇게 모인 씨앗을 사무국장은 밤낮없이 분류한다. 1월 초엔 나눌 씨앗을 선정하기 위해 2박3일 동안 수녀님들과 회원들이 도왔다. 토종벼인 멧돼지찰과 노인다다기로 만든 밥에 토종유채와 토종배추로 만든 김치, 토종 단호박전 등 토종밥상으로 가득 차려 맛나게 먹고, 저녁엔 영화 보는 시간도 가졌다. 아침부터 밤 10시가 넘도록 씨앗 정리를 했다. 고생 끝에 노랑녹두, 불콩, 붉은찰수수, 노가리고추, 세봉상추 등 전국 각지에 뿌리 내릴 토종씨앗 105종의 리스트가 정해졌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제 씨앗마다 소봉투에 담아 토종씨드림 회원에게 갈 준비를 해야 한다. 소봉투에 담는 일은 곡성을 비롯해 가까운 구례, 화순에 사는 청년들과 함께했다. 구례에 살며 학교 텃밭 강사를 하는 한 커플은 처음 보는 씨앗들로 아이들에게 어떻게 교육하면 좋을지 구상했다. 화순에서 온 청년은 혼자 지역에서 살아가는 외로움을 호소했다. 시골에서 사는 청년끼리 오순도순 많은 이야기 씨앗이 피어났다.

이제 온라인 신청서를 열어 일주일간 신청받는다. 토종씨드림은 매년 두 차례 정회원에게만 씨앗을 나눈다. 양이 넉넉하진 않다. 한 회원당 8종의 씨앗을 선택할 수 있다. 모종 내어 심고, 다음해에 증식하는 것은 필수다. 씨앗은 냉장고에서 오래 보관할 수 있으나, 우리가 보내는 씨앗은 냉장고 보관용이 아니다. 되도록 이 해에 바로 심기를 권한다. 나눔 받은 씨앗을 증식해 토종씨드림으로 다시 보내면 더 많은 사람에게 토종씨앗을 나눌 수 있다.

400여 명의 회원이 씨앗을 신청했다. 이번주 최종적으로 씨앗을 정회원에게 보내는 일을 한다. 광주, 오산, 완주 각지에서 회원분들이 도와주러 오신다. 봉투에 붙은 라벨을 보고, 각각 숫자에 맞는 씨앗을 봉투에 담는다. 혹시 잘못 들어가진 않을지 마지막 검수는 필수다. 우체국 마감 시간 전에 맞춰 보낸다. 2024년 봄 토종씨앗 나눔이 막을 내린다.

매년 정회원에게 토종씨앗을 보내는 일을 소수의 토종씨드림 사무국원만 해내기엔 버거웠을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매년 도와주는 분들이 있어 가능했다. 땡볕에 땀 뻘뻘 흘려가며 풀 매고 거름 줘가며 얻어낸 귀한 토종씨앗. 자기 먹기도 아까운데 매년 지퍼백 한가득 보내주신다. 추운 겨울, 시간 내어 차 타고 버스 타고 오시는 귀한 걸음들 덕분에 전국에 토종씨앗이 퍼진다. 다양한 작물이 전국에서 자라나고, 또다시 씨앗을 내어 주변에 퍼질 것이다. 토종씨앗이 널리 퍼지는 건 자유의 퍼짐이고 자립의 퍼짐이다.

글·사진 박기완 토종씨드림 활동가

*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네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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