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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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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질 대신 냉이만 캐던 밭장의 봄선물

밭 뒤집고 퇴비 주며 봄농사 시작… ‘자영농’ 선호하던 밭동무 ‘귀순’해 공동밭 고랑 30여 개로 늘어
등록 2024-03-22 13:06 수정 2024-03-25 10:18
2024년 3월16일 오전 텃밭에서 밭장이 삽질할 생각은 않고 냉이를 캐고 있다.

2024년 3월16일 오전 텃밭에서 밭장이 삽질할 생각은 않고 냉이를 캐고 있다.


2024년 3월16일 토요일, 텃밭에 봄이 왔다. 아침 일찍부터 동무 4명이 밭으로 모였다. 가을 농사 마친 뒤에도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만나 밥과 술을 나누며 겨울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던 터다. 봄 봄 봄 봄, 봄이 왔다.

지난 초겨울 갑자기 추워져 반쯤 언 무와 배추를 서둘러 거두던 날이었다. 추위에 잔뜩 웅크린 상추가 가여워 비닐 쪼가리를 덮어줬다. ‘겨울을 무사히 났을까?’ 비닐을 들춰보니 상추는 간데없고, 싱그러운 연초록 들풀이 잔치를 벌이고 있다. 옆 밭에선 겨울을 난 쪽파가 꼿꼿하게 줄기를 뻗고 있다. 저만치 비닐 터널 속에서 봄을 맞은 양파도 의젓하다. 두툼한 낙엽 이불을 덮은 마늘도 군데군데 새순을 푸릇푸릇 올렸다. 봄이 왔네, 봄이 와.

지난해 한 고랑 심었던 작두콩이 대풍이었다. 텃밭 동무들은 이구동성 “더 심자”고 의기투합했다. 농막 뒤쪽으로 밭고랑 2개를 더 만들기로 했다. 몇 달 만인가? 목장갑 끼고 삽을 들었다. 한삽 두삽 뜨다보니 이마에 슬며시 땀이 배었다. 동무랑 둘이서 움직이니 금방이었다. 삽 들고 고랑 쪽으로 오던 밭장은 삽질 대신 냉이를 캐고 있다. 입에서 술술 휘파람이 새나온다.

봄 농사는 대체로 3월 중순에 밭을 엎어 퇴비를 넣어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3월 말에 씨감자를 제일 먼저 넣고, 4월 초중순에 잎채소 종자를 뿌리고 모종도 옮겨 심는다. 뒤늦은 꽃샘추위로 4월에도 냉해를 입는 때가 드물지 않다. 그런데 밭으로 오는 차 안에서 밭장이 이렇게 말했다. “올해는 채솟값도 비싸고, 상추를 일찍 냅시다.”

2023년 갑자기 눈이 왔을 때 배추 덮어줄 요량으로 산 비닐을 잘 개어 보관해놨다. 상추 모종을 심고 비닐 터널을 만들어주면, 예년 5월 중하순에야 수확을 시작했던 상추를 4월 안에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어깨춤이 절로 났다. 겨우내 밭에 방치해둔 퇴비 2개를 헐어 잎채소 모종을 낼 밭 세 고랑을 뒤집었다. 한참을 냉이만 캐던 밭장도 삽을 들었는데, 밭 뒤집을 생각은 않고 “여기도 냉이, 저기도 냉이” 타령이다. 김치냉장고용 김치통 1개가 얼추 냉이로 채워졌다. ‘저걸 언제 다 다듬으려고….’

겨우내 내린 눈비로 경계가 흐릿해진 고랑과 고랑 사이 흙을 떠 올리고, 쇠스랑으로 슬슬 밀어가며 평평하게 골랐더니 밭이 예뻐졌다. 작두콩과 호박 밭에 세워준 지지대에서 말라붙은 작물의 흔적을 걷어냈다. 지난해 농사를 망친 허브 밭에 수북한 마른 풀을 걷어 한쪽에 쌓았다. 한동안 불쏘시개 걱정은 없겠다.

텃밭 동무 8명 중 6명은 공동으로 밭을 일군다. 주말농장 초기부터 10년 넘게 같이 해온 나머지 2명은 ‘자영농’을 선호했다. 그런데 자영농 1명이 ‘의거 귀순’을 결심해, 올해부터 함께 밭을 갈겠단다. 공동밭 고랑이 30여 개로 늘었다. ‘귀순 용사’의 특기를 살려 밭장이 즉석에서 ‘대파·토마토·작두콩·수세미 작목반장’에 봉했다.

제법 땀이 날 때까지 일하고, ‘시농제’ 겸 함께 점심을 들기로 했다. 다들 나서려는데, 밭장이 쪼그리고 앉아 냉이를 다듬기 시작한다. 한소리 듣고도 일어설 줄 모르고 듬성듬성 다듬기를 마친 밭장이 냉이를 세 뭉치로 나눠 내민다. 얻어간 두 사람은 “진짜 맛있었다” “정말 부드럽다고 칭찬이 자자하다”는 후기를 단톡방에 올렸다. 정작 밭장은 “이상한 놈이 섞여서 (아내에게) 빠꾸 맞았다” 한다. 그래 꽃송이가, 꽃송이가 곧 피리라.

글·사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네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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