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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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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빠죄아’ 아닌 ‘술빠죄아’

사랑을 쉬고 싶을 때 본 <술집도시여자들>
등록 2022-02-26 14:20 수정 2022-02-27 02:37
티빙 제공

티빙 제공

사랑에 빠지는 게 죄는 아니라지만,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다) 사생활이 지속되면서 업무에도 심대한 지장이 왔다. 사랑에 빠지는 대상이 많아질수록 휴대전화에 설정해둔 알림은 시도 때도 없이 울리고, 봐야 할 게 늘어나면서 ‘못 봤다’는 조바심과 ‘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문서를 작성하다 눈앞에 스리디(3D)로 지난 사랑의 춤선이 떠오르고, 귓전에 그가 읊었던 대사가 울린다. 아, 중증이다.

이럴 땐 돌파구가 필요하다. 잠시 멈춤. ‘잠시 멈추고 명상’은 아니고 잠시 멈추고 시작한 것은 2021년 10월 티빙에서 공개한 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술도녀>) 정주행. 직장생활의 ‘빡침’을 술과 안주와 우정으로 달래는 여자들의 ‘술잔 적시기’ 에피소드들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술에 대한 ‘열쩡’이 생기긴 처음이었다.

첫 시도는 ‘미소’. 미지근한 소주의 줄임말이다. <술도녀> 주인공 여자 1, 2, 3은 모두 ‘미소’ 애호가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찍먹/부먹’, ‘슈붕/팥붕’에 이어 ‘미소/찬소(찬 소주)’ 논쟁이 잠깐 일기도 했다. 미소는 무슨 맛일까. 호기심에 굳이 20년 전 대학 친구를 불러 애꿎은 실험을 하다가 토사물로 지하철 역사를 더럽혔다.(죄송합니다.) 미소가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등 두드려주는 친구의 손길이 따뜻했다.

두 번째 시도는 폭탄주 제조. 만사에 긍정적이며 술에 진심인 여자 2(한선화 분)가 ‘과수원길’을 부르며 소주와 맥주가 담긴 술잔을 180도로 왕복시키는 모습에 도전 의식이 생겼다. 정말, 술은 낙하하지 않는가.

일단 유튜브를 켜고 ‘폭탄주 꿀팁’ ‘인싸 되는 소맥 제조법’ 같은 영상을 시청했다. 여자 2가 회식 자리에서 선보인 180도 회전 폭탄주는 자동차 와이퍼의 움직임과 같다고 하여 ‘와이퍼주’. 자신감이 중요하다. 머뭇대면 실패한다. 첫 시도 낙하. 두 번째 시도 낙하. 세 번째 시도 다시 낙하. 주문을 왼다. 자신감이 중요하다. 머뭇대면 실패한다. 네 번째 시도, 드디어 성공. 아이들이 잠든 밤, 식탁에 수건을 깔고 술잔을 휘날리다 알코올로 흥건해진 수건을 보며 새삼 고등학교 시절 물리 시간에 배웠던 원심력과 구심력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때 폭탄주를 말았다면, 수능 한 문제는 더 맞혔을까.

세 번째 시도는 ‘도가니 수육’. 여자 1, 2, 3이 모여 도가니 수육에 소주를 먹는 장면에서 나는 정주행 마지막까지 ‘도가니에 소주’ 조합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돌솥에서 지글지글 끓는 쫀득한 콜라겐 덩어리에 진한 소주. 나이 앞자리가 달라지기 전까지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한 조합이다. 단체대화방에서 직장 후배들이 하는 ‘내 뒷담화’를 보고 듣고 만 여자 3과, 고객님들의 컴플레인에 언제나처럼 상쾌하게 대처한 여자 2와, 온라인에서 댓글로 욕하는 초등학생을 실제 세계에서 장난감총으로 쏴서 응징한 여자 1은 긴 말 없이 도가니 회합을 도모해, 잔을 적신다. 마셔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내가 오늘 기가 빨리고 당이 떨어진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그냥 만나서 해가 진 자리에 달이 뜨고, 달이 진 자리에 새벽 별이 뜰 때까지 온몸을 적시는 일이 새삼 로망으로 다가왔다. 언제 그래봤더라.

이는 어쩌면 술에 대한 ‘열쩡’이라기보다, 가족과 생계를 뒤치다꺼리하다 어느새 보내버린 젊은 날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드라마를 빙자해 친구들과 진하게 술잔을 적시며 사랑은 잠시 쉬었으니, 다시 또 열렬히 사랑에 빠져야지.

리담 칼럼니스트 dorisleewall@gmail.com

*바야흐로 유튜브 시대. 1분에 업로드되는 동영상은 500시간, 매일 10억 시간 이상 동영상이 조회된다. 이 통계에 혁혁히 일조하며 ‘관련 동영상’의 세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급기야 매일같이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저자의 외침! 유혹에 ‘금사빠’가 돼버렸지만,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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