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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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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에 쌓은 적금, 만기는 봄이랍니다

[인천 계양 편] 세력 잔뜩 불린 독일붓꽃, 스스로 고개를 내민 보리지… 봄에 맞는 텃밭의 싱그러움
등록 2024-04-12 06:41 수정 2024-04-18 23:07
보리지가 있던 자리에서 새롭게 태어난 보리지 새싹들. 이아롬

보리지가 있던 자리에서 새롭게 태어난 보리지 새싹들. 이아롬


옷차림이 점점 가벼워지고 밭에 싱그러운 초록색 싹이 올라오기 시작하니 마음이 부푼다. 작년에 묻어둔 작물을 기대하며 밭으로 나가는 기분이란 꼭 만기된 적금을 찾으러 가는 기분이랄까. 당장 먹을 것을 기르는 일년생 작물과 달리 다년생이거나 월동하는 작물의 씨앗을 미리 뿌려두는 일은 꼭 적금을 넣는 것과 같은 기분이다. 이율은 높지 않지만 한땀 한땀 모아놓은 걸 크게 돌려받게 되니까. 밭으로 걸어가는 잠깐 사이(집에서 밭까지의 거리 180m)에 작년에 넣은 예금을 떠올려본다.

작년 양평에서 친구 이파람을 도와주고 선물 받은 루바브 모종을 제일 먼저 찾는다. 2~3년째 되는 해부터 수확할 수 있어 미래를 기대하며 애지중지 돌봤건만 처음부터 빈자리였던 듯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커다란 근대처럼 생긴 루바브는 새빨간 줄기가 새콤하다 못해 시큼한 맛을 내는 식물인데 프랑스에서는 깍두기처럼 덜렁덜렁 썰어서 설탕에 버무려 먹는다. 신맛을 워낙 좋아해 몇 해 전 충주의 와이너리 농장 ‘레돔’에서 파이로 구워 내놓은 걸 맛보고는 푹 빠져버렸는데, 진정한 농사꾼이라면 좋아하는 맛 정도는 스스로 길러 먹을 줄 알아야 한다. 비록 상환조차 못한 투자였지만 언젠가는 꼭 내 손으로 길러 먹고 말리라!

버스정류장 쪽으로는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의미로 튤립이며 무스카리며 알리움 같은 추식구근을 잔뜩 사다 심었는데 발아율이 썩 높지 않다. 어쩐지 작년 가을부터 밭에 고양이가 자주 보이더니 야생동물이 파놓아 나뒹구는 구근의 흔적이 여기저기 보여 마음이 쓰다. ‘어깨에서 사서 무릎에서 판다’는 기분이 딱 이런 걸까? 원금도 돌려받지 못한 추식구근은 이제 그만 내년의 적금 목록에서 지워야 하지 않을까? 처음으로 고양이가 원망스러워진다.

하지만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게 인생. 밭 입구로 작년 구근을 두어 개 얻어 심은 독일붓꽃의 세력이 잔뜩 늘었고, 올해는 에린지움이 월동을 했다. 텃밭은 물 빠짐이 잘되지 않는데다 남쪽 해도 막힌 땅이라 꽃을 심어놓고도 걱정하는 게 일인데, 꽃을 과감하게 늘려봐도 좋다는 뜻일까? 자급도 해야 하고, 사치도 부리고 싶은데 땅이 좁은 도시농부는 마음만 동동거린다.

에린지움 옆으로는 셀프시딩(self-seeding)을 한 보리지 싹이 올라왔다. 보리지는 오랫동안 돌보는 방법을 몰라 제대로 기르지 못하고 속절없이 보낸 식물이었다. 그런데 틀밭을 정비하고 기르니 재작년부터 사람 키만큼 자라났다. 특유의 커다란 덩치와 은회색과 보랏빛을 띤 색감으로 텃밭을 기품 있게 꾸며줬다. 게다가 오이 향을 내뿜어 싱그럽기까지! 뿌리지도 않은 보리지의 싹이 올라오자 돌려받지 못한 적금의 아쉬움이 눈 녹듯 사라진다.

며칠 전부터 죽은 줄 알고 낙담했는데 아스파라거스가 쏙 올라오기 시작했고, 작년 한땀 한땀 모아 틀밭으로 옮긴 달래는 1년 사이에 후손을 많이 남겼다. 밭으로 놀러 온 친구에게 호미 하나 던져주며 양껏 따가라고 인심을 썼다. 역시 친구에게 한턱 쏘는 게 적금 만기의 커다란 기쁨이지. 언덕에 머위를 심고, 절화로 쓸 수 있는 클로버 씨앗을 뿌려볼까? 봄에 맞는 달콤한 적금 만기를 조금 더 누려보고 싶다.

글·사진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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