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로망’ 중 하나는 논농사를 지어보는 것 아닐까. 한국인의 주식인 쌀을 내 손으로 키워 먹는다는 특별함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논은 접근이 어렵기 때문이다. 나처럼 지역 농촌이나 농사에 깊숙이 들어가지 않은 뜨내기에게 논이란 임자가 있어서 들어갈 수 없거나 규모가 너무 커서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존재니까.
하지만 세상에는 부푼 꿈만 가진 논농사 지망생에게도 기꺼이 땅을 내주는 사람이 있다. 충청남도 홍성에서 자연농을 탐구하며 농사짓는 금창영 농민이 그렇다. 그와는 2023년 10월 출간된 책 <모두를 살리는 농사를 생각한다>(목수책방 펴냄) 작업을 함께 하는 동료로 만났는데, 알고 보니 그는 ‘홍성자연농학교’라는 이름으로 8년 동안 무료로 논과 토종벼 종자를 나누고 자연농 논농사 강습까지 하고 있었다.
그가 지향하는 자연농 논은 땅을 갈지 않고 친환경 논농사의 일등 공신으로 여기는 제초용 왕우렁이도 넣지 않는다. 논 안에서는 농기계를 전혀 쓰지 않고 오로지 부추낫 한 자루로 모를 심고 풀을 베고 수확까지 할 수 있는 농사 방식이다. 자연농 논은 모내기부터 달랐는데 펄 속에 모를 심는 일반적 모내기와 달리, 물을 얕게 대어 땅이 드러나 있어 작업 방석을 깔고 앉아 호미나 부추낫으로 땅을 파고 모를 아주심기 하는 방식이다.
금창영 농민은 처음에는 벼농사를 비료나 농약을 전혀 주지 않는 무투입 방식으로 지었지만 어느 순간 수확량이 떨어져 일본의 자연농 농민을 찾아가 자연농 논농사를 배워왔다. 자연농 논으로 전환하고 난 몇 해 동안은 수확량이 적었지만 해를 거듭하고 종자가 토양에 적응하자 수확량이 늘어났다고 한다. 종자를 팔면서 씨앗의 후대를 끊어버리는 시대에 토양에 적응하는 종자 이야기에는 생명력이 가득했다. 이런 농사는 여전히 신비롭고 낭만적으로 들려 농사 꿈나무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우리 논농사는 다른 논농사보다는 느린 방식이었지만 그만큼 다양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모내기 때는 수컷이 알더미를 지고 다니는 물자라를 비롯해 이름 모를 수서곤충들이 주변을 유유히 맴돌았고, 벼를 수확할 때는 메뚜기떼가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경쾌하게 튀어오르며 자리를 옮겨 다녔다. 한 공간에서 다양한 존재들과 함께 보내던 그 순간만큼은 금창영 농민이 줄곧 이야기해오던 ‘평화’와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올랐다.
지난 한 해 논 열 평을 분양받은 내가 키운 벼는 ‘멧돼지찰’. 쉽게 사 먹을 수 없는 품종인데다 이름이 마음에 들어 선택했는데 이름처럼 야생성이 강한 품종이라 종자가 고정되지 않아 거칠고 다양한 색과 모양이 나오는 품종이었다. 거칠고 다채로운 모습을 지닌 멧돼지찰이 나는 참 마음에 들었다. 멧돼지찰을 거둔 뒤 올해에는 밭 한쪽에 심어볼까 싶어 일부는 거실에 걸고, 일부는 도정해서 함께 농사지은 동료들 쌀과 섞어 아껴 먹고 있다.
밥 먹을 때마다 논에 쪼그려 앉아 풀을 베며 바라본 하늘이 떠오른다. 나를 압도하는 높이로 우뚝 선 벼 사이에 앉아 있을 때면 논은 꼭 작은 숲 같았다. 언젠가는 내 논을 갖기, 이렇게 농사 꿈나무의 소원 목록에 한 줄이 채워졌다.
글·사진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농사꾼들: 농사를 크게 작게 지으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지역이 다른 네 명의 필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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