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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국엔 오르세미술관이 없을까?

현대미술관에 더부살이하는 근대미술… 이건희 기증품 계기로 근대미술관 설립 필요성 제기
등록 2022-01-12 14:19 수정 2022-01-13 15:06
프랑스의 근대미술관인 오르세미술관. 프랑스는 1986년 루브르박물관과 퐁피두센터에서 소장한 19세기 작품을 분리해 오르세미술관을 신설했다. REUTERS

프랑스의 근대미술관인 오르세미술관. 프랑스는 1986년 루브르박물관과 퐁피두센터에서 소장한 19세기 작품을 분리해 오르세미술관을 신설했다. REUTERS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가족이 2만3천여 점의 소장품을 기증한 직후인 2021년 4월30일 미술계 인사 100여 명이 성명을 냈다. 이번 기증을 계기로 ‘국립근대미술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의견이 담겼다.

미술계 인사들은 “근대미술이 국립현대미술관에 더부살이하는 기형적 상황이 이어져왔다. 이번 기회에 국립근대미술관 건립을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구체적 방안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이 보유한 2천여 점의 근대미술품과 이번에 기증된 1천여 점의 근대미술품을 바탕으로 국립근대미술관을 설립할 수 있다고 했다. 미술관 안에 ‘이병철실’이나 ‘이건희실’을 둬서 기증자를 기념하자고도 덧붙였다.

미술계의 오랜 염원

당시 미술계 인사들은 국립근대미술관의 후보지도 2군데 제시했다. 2021년 11월 ‘(가칭) 이건희 기증관’ 최종 후보지로 결정된 서울 종로구 송현동과, 광화문에 있는 정부서울청사 자리다. 송현동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과 선재미술관, 서울공예박물관, 인사동을 연결해 시너지가 크다. 정부서울청사는 한국의 근대화를 견인한 장소이며, 국가 상징 거리인 세종로에 있다.

국립근대미술관 설치는 미술계의 오랜 염원이다. 왜냐하면 1969년 한국에서 국립미술관이 처음 만들어질 때 ‘국립고전미술관’이나 ‘국립근대미술관’이 아니라,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은 국립고전미술관이나 국립근대미술관이 없는 나라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그 이름처럼 많은 전시를 통해 1970년대 이후의 ‘현대(당대, 동시대) 미술’에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로 인해 근대미술(1860~1970년대)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더부살이’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이런 고민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영어 이름 변화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1969년 경복궁미술관에서 처음 문을 열었을 때의 영어 이름은 ‘내셔널 뮤지엄 오브 모던 아트’였다. ‘모던’은 미술사에서 대개 ‘근대’를 뜻한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의 활동은 현대미술에 집중됐다. 그래서 1986년 과천관이 문을 열 때 실제에 더 부합하도록 영어 이름을 ‘내셔널 뮤지엄 오브 컨템포러리 아트’로 바꿨다. ‘컨템포러리’는 ‘현대’ ‘당대’ ‘동시대’를 뜻한다. 그러다 2013년 종로구 소격동에 서울관을 열면서 다시 ‘내셔널 뮤지엄 오브 모던 앤 컨템포러리 아트’로 바꿨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국립근현대미술관’이 된다.

“전통 회화도 별도 미술관 필요”

국립근대미술관 설립에는 많은 미술인이 공감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근대미술관 격인 덕수궁관 관장을 지낸 최은주 대구미술관장은 “일본은 도쿄와 교토의 근대미술관이 먼저 시작했고, 거기서 현대미술관이 나왔다. 프랑스도 루브르박물관(고대~르네상스)-오르세미술관(근대)-퐁피두센터(현대) 체계를 갖추었다. 이제 한국에도 근대-현대 미술관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달진 미술자료박물관장도 “그동안 국립현대미술관이 근대미술을 아우르지 못했다. 전시가 현대미술에 몰려 있고 근대미술은 소외돼왔다. 근대미술은 일제와 6·25전쟁 등 어려운 시기를 거쳤는데, 이제 와서도 찬밥 신세다. 독립된 국립근대미술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립근대미술관뿐 아니라, 국립중앙박물관의 한 방에서 전시되는 전통 회화도 별도의 미술관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선진국의 대도시들은 고전-근대-현대 미술관 체계를 갖춘 경우가 많다. 최은주 관장이 거론한 프랑스 파리도 그렇고, 영국 런던도 내셔널갤러리(고전)-테이트브리튼(근대)-테이트모던(현대) 등 시대와 사조에 따라 다양한 미술관을 갖추고 있다.

파리는 루브르박물관과 퐁피두센터에서 소장했던 19세기 화가들의 작품을 분리해 근대미술관인 오르세미술관을 1986년 신설했다. 오르세는 옛 기차역을 재활용한 미술관으로도 유명하다. 런던은 테이트브리튼에서 소장했던 20세기 작가들의 작품을 분리해 2000년 현대미술관인 테이트모던의 문을 열었다. 테이트모던은 옛 화력발전소를 재활용한 세계 제1의 현대미술관이다.

최열 미술사가는 “조선 후기만 해도 100명 넘는 화가들이 활동했다. 최근 조선시대 화가의 전시회를 열면 엄청난 호응을 얻는다. 그런데 조선 화가 중에서 단독 전시회를 연 경우가 손에 꼽을 정도다. 전통 회화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미술관이 필요하다. 국립전통회화미술관을 생각해볼 때가 됐다”고 말했다.

전진성 부산교대 교수(사회교육과)는 “그동안은 소장품이나 재정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도 시대나 사조에 따라 특화된 미술관을 마련할 역량이 된다. 근대미술관이나 전통미술관이 모두 필요하다. 다양한 미술관이 가까이 모여 있어 시민들이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가칭) 이건희 기증관’을 두고 폭발한 지방 도시들의 국립미술관 유치 열기를 지방 국립미술관 확대로 전환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현재 수도권에 몰린 국립미술관을 지방 대도시로 확대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다. 현재 국립미술관은 서울에 2곳과 경기도 과천 등 수도권에 3곳이 있고, 지방엔 충북 청주 1곳뿐이다. 반면 국립박물관은 서울에 1곳, 지방에 13곳이 있다.

“현대미술관 소장품 지방 도시로”

선승혜 대전시립미술관장은 “한국의 경제력이나 문화력이 커졌으므로 국립미술관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있다. 현재가 한국 문화의 르네상스다. 고 이건희 회장의 기증에서 보듯 앞으로 20세기 화가와 소장가들의 기증도 쏟아질 것이다. 대도시를 비롯해 전국에 미술관을 늘려야 한다.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투자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은주 대구미술관장도 “이번 일을 계기로 지방에서도 미술관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문화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이제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을 과감하게 지방의 대도시로 나눠야 한다. 미술관도 균형발전 차원에서 봐야 한다. 조선시대에도 실록을 4군데 사고에 나눠 보관했다. 안전관리 차원에서도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최병식, ‘한국미술사 정립을 위한 근대미술관 설립의 필요성’, 2019
최은주, ‘국립기관으로서의 근대미술관 설립 방안에 관한 연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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