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을 봤다. 과연 소문대로 한번 시작하니 멈출 수 없어 9회를 연달아 시청했다. 몇 회였나, 생존자들이 게임이 끝나고 식사로 제공된 삶은 감자를 지친 표정으로 먹고 있었다. 여성 참가자 새벽이가 들고 있는 감자가 푸르스름했다. 저 감자 해를 너무 쬐었네, 생각하는데 그 장면을 함께 보던 남편이 말했다. “왕왕이네.” 감자는 크기별로 특, 왕, 왕특, 왕왕 등으로 구분한다. 농사지은 지 2년 만에 내 눈엔 너만 보인다, 감자.
9월 초, 감자를 수확했다. 가을장마라 시간이 날 땐 비가 오고, 비가 안 올 땐 일이 있고, 일정 맞는 일꾼은 없고 걱정이 한가득이었는데 다행히 9월 첫 주말 예보된 비가 안 온 틈을 타서 재빨리 캐기로 했다. 금요일 아침, 남편과 나는 생업을 팽개치고 엄마를 모시고 진부에 갔다. 점심을 먹고 비닐을 벗기기 시작했다. 다른 밭에서 일꾼들이 비닐 걷는 걸 봤을 땐 쓱쓱 힘들이지 않고 걷던데, 우리 밭은 풀뿌리와 덩굴이 비닐에 엉켜 수월하게 벗겨지지 않았다.
지난 글에서 비닐 없이는 농사가 안된다고 비닐에 대한 믿음을 피력했는데 과연 그러한가, 의심이 들었다. 비닐을 씌우는 건 수분 조절과 풀 관리가 목적인데, 비닐을 씌운다고 풀이 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비닐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 계기는 또 있다. 봄에 멀칭할 때 힘에 부쳐 비닐을 안 씌운 고랑이 있었는데, 거기에도 감자를 심어봤다. 비닐 벗겨서 한 고랑, 안 씌운 한 고랑 호미를 들고 먼저 캐봤는데 작황에 별 차이가 없지 않은가. 비닐 씌우느라 고생, 벗기느라 또 고생, 풀은 풀대로 자라고, 결과엔 차이가 없다면 비닐 멀칭은 다만 의미 없는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건 아닐까.
물론 현재 관행농법은 한 세기 가까운 경험이 쌓인 합리적 결과물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과연 우리 같은 조건의 농사꾼에게도 맞는 방법일까. 비닐에 엉겨 붙은 덩굴을 뜯어내느라 용쓰다가 풀을 저주하고 비닐을 의심하고 왜 이런 일을 벌였을까 스스로를 탓하며 비닐과 싸우다보니 해가 아주 넘어가기 전에 일이 끝났다.
다음날 아침 7시에 작업을 시작했다. L사장님이 트랙터를 몰고 오셨다. 언니가 조카 둘을 데리고 일찍 도착했다. 트랙터가 고랑 세 개를 타고 지나가니 감자가 땅 위로 올라왔다. 600㎏ 들어가는 커다란 자루 두 개를 내놓고 한쪽엔 주먹보다 작은 것, 한쪽엔 주먹보다 큰 것을 담으라고 했다. 빨간 함지를 두 개씩 들고 한 고랑씩 맡아서 담기 시작했다. 쪼그리고 앉아 함지 두 개를 채워 일어나니 고관절이 탈출할 것 같았다.
아침 7시에 시작해 저녁 7시까지 12시간 감자를 주우니 일이 끝났다. 600㎏ 자루 2개가 나왔다. 벌레 조금 먹은 것, 캐다 상처 난 것 등은 자루에 담기지 못했다. L사장님이 트랙터에 우리 감자를 싣고 가셨다. 우리 감자는 선별기에서 크기별로 나뉜 다음 저온창고로 간다고 했다. 왕왕은 없고 특 또는 왕, 그리고 대부분 조림용으로 분류될 것이다. 먹을 수 있지만 상품성이 없는 감자가 자루에 담은 것의 배는 넘었는데, 얘들은 선별장에 가보지도 못하고 탈락했다.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지 못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자려고 누우니 밭에 버려두고 온 감자가 눈에 아른거려 피곤한데 잠이 오질 않았다. 이래저래 감자 생각이 떠나지 않는 나날이다.
글·사진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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